기린이 웃고 있어, 그러니 너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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타인의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을 읽어내버리는 능력은 내 과거의 유산이라고 심리치료사는 말했다 아동학대 성인 생존자

사람들이 흔히 알아채지 못하는 변화의 기미와 타인의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을 읽어내는 능력은 내 과거의 유산이라고 심리치료사는 말했다. 트라우마적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위 환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읽어내줄 감각이 필요했다는 것. 특히, 수시로 죽 끓듯 하는 부모의 변덕에 적응하기 위해 한 발 앞서 기복을 민감하게 알아채야 했던 것이다. 이것이 재주의 일종이라고 한 건 그녀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감탄없이 건조하게 방어기제라고 덧붙인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. 다른 상담사처럼 특별한 능력이라도 되는냥 추겨주지 않은 점이 되려 좋았다. 그 재주가 양날의 검이란 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에. 또한 반가웠다. 마치 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가 당연한 타국의 거리에서 오랫동안 듣지 않았어도 단숨에 귓 속으로 쑤욱하고 파고드는 모국어가 들린 것처럼.

이 재주는 부모가 보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마저 민감하게 포착해냈다. 모순이었다. 살아남으려 익힌 재주가 종종 날 곤란하게 했다. 읽어내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의식적으로 취사선택할 수 없었다. 의도적인 기술이 아니었기에, 무의식적인 심리적 기제였으므로.

내 부모는 그들의 가혹행위를 보지 말라고 했다.그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몸과 그것을 지각하는 의식을 분리하고 싶어했다. 그들은 날 학대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실제하지 않는다고 했다. 내 인격을 모욕하고 날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면서도 그 학대들을 모두 부모의 사랑이라 포장했다. 

내 마음의 생채기가 내게 '사랑 따위가 아니야, 그럴 리가 없잖아' 라 조용히 알려줬지만 내 진실은 그들의 부정과 부인을 이길 수 없었다. 결국 이 세상에 날 쏟아낸 사람들이지 않은가. 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.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아직은 덜 발달된 약한 존재일 뿐이었다. 그러니 내 현실은 두 쪽으로 갈라졌다. 나의 이야기와 그들의 이야기. 결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평행선. 머리가 굵어진 후엔 내가 내 시선을 선택하면 그들에게서 내쳐질 걸 알았다 감히 그럴 수 없었다. 무서웠으니까, 내가 미친 게 나았다. 그들이 미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. 

최초의 타인과의 관계에서 튀어나온 이 민감함은 이제 나의 일부분이 되었다. 사람들은 학대적 원가족에서 벗어나 대체 가족을 찾는 것이 더러워진 이 옷을 벗고 세탁된 저 옷으로 갈아입는 행위인양 가볍게도 말한다. 학대자의 흔적은 학대의 상흔은 내 몸에 아로새겨졌다. 그것은 나의 한 부분이다.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.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. 내 부모처럼 혼돈과 혼란 속에서 고통받으며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.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한번도 태어나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한번도 살아 보지 못한 채 어이없이 죽는 줄도 모르게 어느 순간 생은 끝나버릴지도 모른다, 마치 내 아비처럼.

그러니 부디 내 상처를 외면하지 않기를. 그것만이 어쩌면 내 인생 유일한 목표일지도 모른다. 혼자 내버려졌던 날 더 이상 내치지 않는 일. 그런 상처투성이로 10살에 고착된 날 미워하지 않는 일. 아직도 울고 있는 아이 옆에 다만 같이 앉아 있어주는 일. 그건 분명 내 아비가 마지막까지 당신 자신에게 해 줄 수 없었던 일. 그러니 내가 내 편이 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난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. 

'악함'이라는 단어가 합리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은 주고받는말

'악함'이라는 단어가 합리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은, 펙의 주장에 따르면, 자신이 타고나길 선해서 어떠한 악한 일도 할 리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이라고 한다. 이런 류의 사람들이 타인을 공격하거나 해를 끼쳤을 경우- 이런 사람들은 '자신은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고 항상 옳은 편에 서며 오직 바른 일만 한다'고 굳게 믿기에.- 자기 마음 속의 내러티브를 실은 자신이 아닌 상대방이 나쁘다는 식으로 조정하지 않을 수 없다. 펙은 이런 비뚤어지고 부정직한 관점이야말로 '악함'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. 지금 세계에 자행되는 대부분의 해로움은 이런 류의 사람들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. 

 "원한을 품는 방법" -소피 한나

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혼잣말

"너희와 있을 때는 나의 좋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왔어. 그래서 그런 착각도 했어. 나는 나아졌고,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. 너희들에게는 너희가 좋아할 만한 내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어. 그리고 나에게도.
 그런 식으로 내가 나를 따돌렸던 것 같아. 너희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미워 보이고 창피했던 내 모습을 따돌렸어. 예전부터 그랬었어.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.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. 저리 가. 나는 그애에게 말했어. 내 눈에도, 남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. 왜 너는 죽지도 않아?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 있어?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. 
예전 일들을 잊고, 지워버리고,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, 내 안에 갇힌 그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,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된 것처럼 연기했지. 그게 다 뭐였을까. 그애는 나였는데."

  최은영 소설집 [내게 무해한 사람] 가운데 '모래로 지은 집' 에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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